1. 초반 스텔레가 불행합니다.
2. 단씨 가문이 어쩌다 보니 쓰레기입니다.
3. 단풍(형)과 단항(동생)은 피를 나눈 형제
4. 유사 근친입니다. (현대 au)
5. 그 외 어떤 것도 괜찮다면 부디 읽어주세요.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입적하는 건 도대체? 왜? 어째서? 라는 의문을 나오게 했다. 차라리 천진난만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일어난 거라면 괜찮았다. 그러면 적어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더 이상 너를 맡아줄 수가 없겠구나.” 라는 말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친척에게 들었을 때, 땅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 마디로 그거였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나가라는 거였다. 하지만 정말로 안타깝게도 갓 성인이 된 나에게 돈이라는 건 없었다. 좀처럼 대학 등록금을 내주지 않았던 부분에서 의심해야 했는데. 결국 기한이 지났고 그토록 열심히 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나 자신도 친척에게 얹혀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고, 좋지 않은 머리로 대학까지 가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다.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친척에게 그 모든 것들이 소용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진심으로 가족이라고 생각한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적중했다.
“널 데려가실 분이 계셔.” 라는 말에 “에?” 라는 멍청한 반응이 나왔다. “거기서 잘 지내렴.”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느꼈다. 아, 설마 나 팔린 건가? 차라리 이런 생각 따위 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너무나도 상심이 크고,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가, 눈물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도 마음이 잘 맞고 다정한 부부에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 팔린 건가요?”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다. 그렇다면 알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얼마로 측정되었는지, 당신들이 내 몸값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 돈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나를 버려도 좋을 만큼 대단하고 엄청난 금액인지. 그러나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런 것들을 알게 되면 정말로 내가 인간이 아니라 소모품 취급 받는 것 같아서.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미,
“얼른 나가렴, 기다리고 계신다.” 삼촌이 자신에게 손을 뻗는다. 손목이 붙잡히고 억지로 끌려 나간다. 싫다고 발버둥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진다. 순순히 따랐다. 그렇게 나온 문밖에는 검은색 차량이 우뚝 서 있었다. 딱 봐도 비싼 차였다.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선팅된 창문이 서서히 내려간다. 거기에는 어느 한 미중년이 있었다. 불쾌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사로 보이는 이가 운전석에 내려서 나보고 타라는 것처럼 뒷좌석 문을 연다. 저 남자와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무섭다. 불쾌하다. 두렵다. 뒤늦게 삼촌의 얼굴을 올려다봤으나, 사람 좋은 미소로 “이 아이입니다.” 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을 억지로 뒷좌석에 우겨 넣었다. 짐은 없었다. 그저 오늘 입고 있는 흰색 티와 청바지가 전부였다. 휴대폰도, 지갑도, 저 집 안에 있는 나름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 어느 물건도 제 품에 없었다. 그저 육식동물에게 목을 내어주는 초식동물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전부였다. 문이 닫히고, 그렇게, 그렇게… 차가 이동한다.
“너를 키우고 있었던 저 부부가 나에게 돈을 빌려간 것을 알고 있느냐?”
드럽게 좋은 목소리였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충격스러운 그 말에 몸이 절로 움찔거린다. 그토록 들고 싶지 않았던 고개가 자연스레 들게 된다.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잔뜩 빌려간 뒤에는 못 갚겠다면서 너를 팔겠다고 하더군.” 이어진 남자의 말에 사고가 따라가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풍족한 집안은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이 자주 다투긴 했으나, 금전적으로 부족함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사실은 돈이 부족해서 그렇게 서로를 물고 뜯고 싸웠던 걸까.
“네가 아직 몸이 반듯하고 처녀라는 걸 대놓고 어필하더군.” 이어진 수치스러운 말에 절로 두 주먹을 세게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미친….” 결국 참지 못하거 욕이 나왔다. 그러나 남자는 제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 서러움이 폭발하여 눈물을 줄줄 흘려도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은 이 남자에게 겁탈 당하는 건가? 내가 왜?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히끅거리며 입밖으로 소리가 세어나왔다.
“어차피 그 집은 내일 망한다.”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 그쳤다. 딸꾹. 놀라서 이제는 딸꾹질이 나온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설명을 해달라는 의미로 다시 바라봐도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차 안에서는 간헐적으로 제 딸국질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조용하게 운전하던 차가 멈춘 곳은 대저택 같은 집이 보일 때였다. 기사가 먼저 내려서 남자 쪽의 문을 열었다. 내려야 된다는 걸 알고 그냥 저항없이 내렸다. 먼저 커다란 정원이 자신을 반겼고, 저 뒤에는 대저택 같은 집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더럽게 잘 사는 집이라는 건, 충분한 걸 넘어서 기분 나쁠 정도로 알 수가 있었다. 그에 비해서 자신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 곳이 커다란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등록금을 못 냈다고 하던가.” 그런 자신을 남자는 가뿐히 앞서며 말한다. 대꾸하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저 남자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니고 싶다면 늦지 않게 말해라.” 이어진 남자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모든 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이해할 영역이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결론을 내린 걸지도 모른다. 몇 걸음 더 앞서 걷던 남자가 자신을 향해서 반쯤 몸을 돌리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들과 잘 지내거라.”
아들'들‘. 그렇구나, 나를 겁탈할 상대는 이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들이구나. 용건을 끝낸 남자가 마저 걸음을 옮긴다. “가시죠.” 기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뒤따를 뿐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정원에서 현관까지 거리가 상당했다. 도망칠 수 있을까? 길만 외운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 또한 쉽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잠금장치가 하나, 둘, 셋, 넷…. 거기다가 각각 비밀번호가 다른 것도 모자라서 지문에 홍채 인식에, 한 마디로 철통 보안이었다. 기가 팍 죽었다.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한참 걸었다. 슬슬 숨이 찰 즈음에 드디어 완전한 내부에 들어왔다. 거실, 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거실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게 이 남자가 말한 아들들이라는 걸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참 많이 닮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미묘하기 달랐다. 차이가 있다면 키와 앳된 얼굴과 어른스러운 얼굴이라는 정도. 두 사람의 시선이 곧바로 나에게 향했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애는 무표정이었으나 키가 조금 더 큰 쪽은 대놓고 그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좀 이상했다. 따지고 보면 나는 팔려온 입장인데, 죄다 나를 원한다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인사하며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애였다. 그에 따라서 옆에 있는 어른스러운 남자도 “오셨습니까, 아버지.” 라고 하며 공손한 자세를 취한다. 두 아들의 인사에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그걸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눈빛은 두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볼 기세였다. 괜스레 속이 답답했다. 생각해보면 밥도 못 먹고 쫓겨난 신세였다.
“스텔레는 단항보다 두 살 많고, 단풍보다 두 살 어리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예.”
남자의 말에 두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알아서 하라는 것처럼 먼저 걸음을 옮긴다. 그 순간만 기다렸다는 것처럼 키가 큰 아들도 자리에서 벗어난다. 어리둥절한 가운데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앞을 바라보니, 내 또래로 느껴지는 남자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찰 대상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이대로 끌려 가서 그런, 짓을 당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는 와중에 앞에서 예상하지 못한 호칭을 듣게 된다.
“누님.”
“? …??”
낯선 호칭.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어서, 너무 놀란 나머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제 반응에 오히려 저쪽도 놀랐는지 살짝 두 눈을 크게 뜨다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무심한 낯으로 이렇게 말한다.
“저보다 두 살 많다고 하셨으니 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제 이름은 단항입니다. 아까 제 옆에 서 있었던 남자는 제 형님이시고, 이름은 단풍입니다.”
“형님은 성격이 원래 그러시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고 친절하게 설명도 덧붙인다. 그게 마치 기계적인 느낌이, 인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르겠다. 이상해. 그냥 전부 다 싫었다. 자꾸만 차가운 그 표정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이곳으로 팔아버린 그 상황이 떠오른다. 몸이 떨린다. 먹은 게 없지만, 토하고 싶었다.
“…일단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런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졌는지 단항은 그렇게 말하면서 따라오라는 것처럼 몸을 돌린다. “이쪽으로.” 윗층을 향해서 고개를 까딱거리는 그 모습에 애써 발걸음을 옮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걸음으로 어느새 방에 도달했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서 단항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준다. 내부는 단촐하지만 넓었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과 TV.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지냈던 제 방과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이 방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신이 너덜너덜하고 몸이 피곤하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것이 여전히 이 상황을 허락하지 않았다.
“누님은 쉬셔야 합니다.”
옆에서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얼굴을 바라보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심한 채였다. 덕분에 저 걱정이 가짜라는 건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이 애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삐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한테, 왜그래?”
나는 팔려왔다. 한 마디로 물건이 된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거래가 성립되었다. 나는 한 번도 그것을 원한 적이 없는데. 나는 그저 그 단촐한 집에서, 가정에서 눈치만 보고 살아온 것이 전부인데. 한 번도 잘했다는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를, 신이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긴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어차피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을 거면서 왜 방을 내어주는 건데.
“이제부터 제 누님이니까요.”
그 애는, 단항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 넋을 잃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회색 눈동자에 거짓은 없었다. 몰라, 모르겠어. 지금은 마음의 창인 눈동자를 봐도 믿을 수가 없다. 끝내 고개를 숙이는 나에게 단항은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맞은편 방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시선을 다시 활짝 열린 채 자신을 반기는 방으로 향한다. 질끈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도 똑같았다. 그야 당연하지, 이건 악몽이 아니라 현실인 걸. 덜덜 떠는 손으로 벽을 짚는다. 마치 지탱할 것이 필요한 사람처럼, 벽을 의지하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윽, 하면서 눈물이 비집고 올라왔다.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서 방문을 닫고 철컥, 하면서 걸어잠궜다. 소용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방어 태세였다. 그리고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처럼 몸이 액체처럼 주륵, 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그대로 옆으로 픽, 하고 쓰러져버린다. 한계였다.
의식을 잃어버린 스텔레는 알지 못했다. 맞은편 방으로 들어갔던 단항이 숨 죽이듯이 움직여서 다시 복도로 나왔다는 것을. 앞으로 스텔레가 정을 붙여야 하는 그 방 문앞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서 있었다는 것을. 단항이 입을 열지 않은 한, 평생 알 리가 없었다.
추운 감각에 뜨고 싶지 않았던 눈이 억지로 떠졌다. 방이 어두운 것을 보니 밤인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딱딱한 바닥에서 잤다고 몸이 아우성친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절로 탄식이 섞인 한숨이 나온다. 단촐한 이 방에는 시계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몇 시인지 자신이 알 방법이 없다는 거다. 잠을 잤음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고 일어나서 스스로가 굳게 닫았던 방문을 연다.
달칵, 하는 소리가 울리고 정말이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 집의 그 누구하고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 복도가 환해진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움직임을 감지하고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상태로 얌전히 있다면 곧 꺼질, 그런 시스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니, 바닥에는 수프로 보이는 음식과 알 수 없는 종이 가방이 놓여져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굶어서 죽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바보 같게도 그건 또 무서웠다. 죽음이 무서웠다. 그리고 죽기에는 억울하다. 그렇다고 이 집안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싶지 않다. 그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누님.”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맞은편 방에서 단항이 모습을 드러냈다. 쾅!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철컥하면서 방문을 잠궈버렸다. 쿵, 쿵, 쿵. 하면서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 똑똑, 하면서 정중한 노크 소리도 울렸다. “누님.” 문밖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다. 부르지 마, 역겨워, 싫어. 내뱉으면 들려올 목소리가 싫어서 뒷걸음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듣고만 계셔도 됩니다.”
왜?
“수프는 다시 데워놓은 다음에 갖다 놓겠습니다.”
왜?
“종이 가방에 든 것은 옷입니다. 일단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사오신 새 옷입니다.”
왜?
넌, 왜?
나한테 왜그래? ‘이제부터 제 누님이니까요.’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재생된다. 어떻게 너는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데?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치 제 물음에 대답해주는 느낌이었다. “저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믿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그러고 있다. 이 집뿐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될 지경이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이어지는 말에 저도 모르게 경청하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무시하고 다시 바닥에 누워서 잠들면 그만일 텐데.
“누님의 몸을 챙겼으면 합니다.”
“…….”
참으로 정중한 목소리다. 언뜻 걱정스러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후자는 믿지 않았다. 얼마든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진짜로 수프를 데우러 부엌으로 간 모양이었다. 슬쩍 문을 열어서 확인하니 수프는 없었고 종이 가방만 남겨진 채였다. 손을 뻗어서 종이 가방을 가지고 다시 문을 닫고 잠궜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별반 다르지 않는 평범한 옷이었다. 한 벌 더 있었는데, 잠옷이고 속옷도 들어있었다. 펼쳐서 살펴보니 잠옷과 일상복은 사이즈가 맞겠지만, 속옷은 아무래도 살짝 안 맞을 것 같다. 별로 상관없었다. 새 옷을 보니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걸음을 옮긴다. 벽에 딸린 문을 열으니 화장실이었고, 그 옆에는 사람 두 명이 들어가도 거뜬 할 정도의 크기를 가진 욕실이 딸려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처량한 제 신세에 다시 한번 올라오는 울컥함에 문고리를 세게 쥐게 된다. 그러나 들어가서 씻기 위해서 제 의지로 들어간다. 몸이라도 깨끗한 상태로 있고 싶었다. 씻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따뜻한 물로 씻으니 조금, 정말이지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평소에도 머리를 말리는 건 귀찮아서 그저 물기만 대충 털어낸 다음에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스프가 다시 바닥에 놓여져 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로 데워놓은 거네. 자신이 안 먹으면 계속 이러는 건가? 그렇다면 이걸로 귀찮게 해버릴까.
‘누님의 몸을 챙겼으면 합니다.’ …됐다, 관두자. 그래도 악의는 없어 보였다. 수프가 올려진 쟁반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방문을 닫고 잠그는 건 잊지 않았다. 침대 옆 벽에 기대서 수프 한 숟가락을 떠서 먹자, 달큰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고기를 건져서 먹으니 향긋한 육즙이 혀를 자극하고 맛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음식이 들어가니 몸이 더 넣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숟가락을 쥐고 있는 오른손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수프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가서 더 달라고 하기는 싫었다.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밖에다가 내놓고 이번에는 침대에 누웠다. 덜 말린 머리의 물기를 이불이 흡수한다. 수프를 먹어서 따뜻해진 몸은 얼마 가지 않아서 젖은 머리로 인해 추위를 느끼게 된다. 차라리 심한 감기를 앓아서 죽는 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몸을 움직여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웅크린다. 수프 좀 먹었다고 포만감이 찾아와서 서서히 잠이 몰려온다. 그대로 두 눈을 감는다. 곧 의식이 멀어진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워, 나 좀 내버려둬. 두 눈을 뜨고 싶으나 떠지지 않았다. 목이 아프다. 머리도 아프다. 뜨겁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춥고 힘들어. “…님, 누님.” 목소리가 들렸으나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부르지 마, 부르지 말라고, 다 싫어…. 힘겹게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두 눈이 떠졌다. 정말로 그냥 두 눈이 떠졌다. 몸이 조금 나른한 감각을 느꼈다. 그걸 빼면 컨디션은 좋다. 그러니까 아프지 않다. 상체를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방문이 열린다. 분명히 잠궜는데.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어떤 여성 분이 “어머!” 라고 놀란 반응을 보인다. 그러더니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가씨, 깨셨군요. 몸은 괜찮으세요?”
“…누구?”
“아, 저는 이 집의 도우미 아줌마에요.”
그렇게 말한 여성은 “잠시 실례할게요.” 라고 하면서 마저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체온계를 꺼내서 제 귀에 넣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삑—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열을 확인한 그녀는 자신이 기쁜 것처럼 웃으며 “다행이네요, 열이 내렸어요.” 라고 말한다. 자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전부터 몸은 튼튼해서 감기를 앓아도 이렇게 금방 회복한다.
“일주일이나 아프셨어요.”
“네?”
아무래도 철회해야 할 것 같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그 뒤로도 자신에게 이것저것 말해줬다.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까지 거르고 방에서 안 나오는 자신이 걱정된 나머지 단항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대에서 들끓는 열로 정신을 못차리는 자신을 보고 단항이 급하게 의사를 불렀고, 링겔을 맞으면서 그렇게 일주일이나 사경을 헤맸다고 한다. “단항 도련님이 걱정 많이 하셨어요.” 라는 말에 시선을 돌렸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식사는 맑은 죽이었다. 먹고 기운 차려야 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 그 뒤로도 도우미 아주머니는 자신에게 몇 가지 물건을 건네줬다. 첫 번째는 휴대폰. 단항이 새로 개통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여유분의 옷이었다. 슬쩍 속옷 사이즈는 괜찮았냐는 물음에 정확한 사이즈를 알려줬다. 그러면 이따가 나가서 사오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이 죽을 끝까지 다 먹는 걸 지켜본 그녀는 비어진 그릇을 가지고 나갔다.
바로 누우면 좋지 않다고 하지만, 나른한 감각이 지배했다. 그러다가 슬쩍 휴대폰으로 시선이 향한다. 하얀색의 그것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최신 기종이었다. 화면을 두어번 톡톡 두드리자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시스템이 정해놓은 화면이 뜬다. 정리 되지 않은 앱들을 보면서 정말로 개통만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래도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휴대폰 화면을 검게 만든 뒤에 머리맡에 둔 다음에 두 눈을 감아버린다. 처음으로 문을 잠그는 걸 까먹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나른함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말끔하게 회복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한 것은 씻는 거였다. 따지고 보면 일주일이나 땀으로 절여진 몸뚱아리였다. 여분의 옷도 많아졌겠다. 이번에도 물기는 대충 수건으로 털어내다가 베개 옆에 있는 휴대폰으로 시선이 고정된다. 절로 단항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들끓는 열로 사경을 헤맸을 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부르지 말라고 싫다고 했고. 그런데도 그 애는….
역시 휴대폰에 대한 것은 고맙다고 해야 겠다. 한숨을 내쉬며 나온 결론이 그거였다. 방에 있으려나.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또 식사와 종이 가방이 있었다. 슬쩍 종이 가방을 확인하니 내용물은 속옷이다. 그러면 이거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놓고 간 것이고, 죽은 어째서인지 단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닐 수도 있고. 일단 종이 가방은 방으로 들였다. 그 다음으로 걸음을 옮겨서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다가간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반응이 없다. 방에 없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몸을 돌리려고 하는 찰나에 문이 열렸다. 자신을 본 단항이 두 눈을 크게 뜬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이 애, 이런 얼굴도 지을 수 있구나. 지금까지 본 얼굴은 차갑다고 느껴지는 무표정이면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그래서 이쪽도 놀랐다. 그런데 너무 놀란 거 아닌가? 이제는 석상이라고 느낄 정도로 굳어있는 그 모습에 자연스레 입을 열게 되었다.
“휴대폰, 고마워.”
“아…,”
“감기도.”
“누님.”
그제야 단항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자신을 부른다. 그러다가 그 청회색 눈동자가 제 뒤쪽으로 향한다. 정확하게는 바닥에 놓여있는, 차갑게 식어버린 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 데워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지나쳐서 쟁반을 들어올린다. 부엌으로 간다는 걸 알았다.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단항의 옷깃을 붙잡는다. 또 눈을 크게 뜬다. 그러나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이 애와 똑같은 차가운 무표정일 지도 모른다. 가끔 반 애들이 자신의 그런 표정이 무섭다면서 다가오지 못했으니까.
“부엌 갈래.”
“…네, 누님.”
자신의 말에 이 애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해준다. 예쁘네. 자주 웃으면 좋겠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엌으로 가기 전에 머리부터 제대로 말리는 게 좋겠다는 말에 싫다고 답했다. 거기서 단항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나를 부엌으로 안내해줬다. 부엌도 넓구나. 하긴 이 집안에서 안 넓은 곳이 어딨겠어. 단항은 잠시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 능숙하게 죽을 데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여덟시부터 안 계십니다.”
“…….”
제 생각을 완전히 읽혔다는 생각에 놀라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표정을 본 단항이 곧바로 사과한다.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그저 놀랐을 뿐. 고개를 가로젓기도 전에 단항이 몸을 돌렸다. 다 데워진 죽과 반찬 몇 가지를 가지고 식탁 위에 올려준다. 제 쪽으로 가까이 놓아준다.
“다 드시고 식기는 담궈 놓으면 됩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한 단항은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나를 배려해서 먼저 방으로 올라가려는 모양이었다. “있잖아.” 자신은 그런 단항을 불러세운다. 그 애의 청회색 눈동자가 다시 이쪽으로 향한다. 표정에 의아함은 담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린다.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의문을 물었다.
“왜 잘해줘?”
이 애의 입장에서 따지면 자신은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은 단풍 쪽이 맞았다. 그 이후로 그쪽은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여전히 뚱한 반응인지 모르겠지만, 단항은 처음부터 달랐다. 이상했다. 물론 첫 날부터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것보다 낫긴 하지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작 자신을 데리러 온 그 남자도 돈을 주고 샀음에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편한 건 이쪽이지만.
“누님이시니까요.”
단항은 무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거 무슨 의미야? 라고 순간 그렇게 물을 뻔했다. 왠지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령 듣는 다고 해도 무언가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단순 흥미, 어쩌면 변덕,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호의는 식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상처 받을 테니까,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는 게 옳다.
그리고 이 년 뒤, 나는 네가 말했던 “누님이시니까요.” 라는 말의 의미를 묻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 물었다면 조금 더 너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똑똑거리는 소리에 억지로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방 안은 어두웠다. 몇 시지? 휴대폰 화면을 켜서 확인하니 아침 6시가 조금 넘었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거지? 그냥 무시하고 잠들려고 했는데 “누님.” 이라는 목소리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드물게 단항이 곤란한 낯을 하고 있었다. 뭐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같이 아침 식사를 하자고 하십니다.”
솔직히 거절하고 싶다. 싫다고 말하고 싶다.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제 입장에서 그래봤자 좋은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하고 내려가겠다고 했다. 단항이 알겠다면서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내려간다. 적어도 심기를 거스리는 행동은 삼가고 싶어서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앉아라.”
부엌은 어제와 다르게 분위기가 차가웠다. 사람은 분명 자신을 포함해서 네 명인데. 적어도 어제 단항과 둘이 있을 때는 이 정도로 차갑다는 건 느끼지 못했는데. 후다닥 걸음을 옮겨서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도우미 아주머니가 밥과 국을 놓아주셨다. 가볍게 인사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잔뜩 차려진 밥상이었지만, 도저히 무언가를 집어야 할 지 모르겠다. 먹기 싫은 마음이 가득했다. 이대로 이 자리에서 먹으면, 절대로 체한다.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든 손이 서서히 내려간다.
“몇 가지 전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원래는 널 데려온 다음날에 할 말이었으나 아팠다고 해서 말이지.” 남자의 목소리에 깃든 건 질책도 걱정도 아니었다. 그냥 있는 사실만 전할 뿐이었다. 시선은 이쪽을 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 상태로 계속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 두 사람은 사고로 죽었다.”
두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나를 여기로 팔아버린 두 사람. 사실은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두 사람. 아무렇지 않게 나를 버린 두 사람. 그렇다고 해도 충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고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어차피 그 집은 내일 망한다.’ 차 안에서 이 남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게 죽인다는 말이었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장은 미리 받아왔다. 호적에도 이름을 올렸으니,”
“왜 나를 데려온 거예요?”
이 남자가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그 두 사람을 죽였으면서 자신은 왜 데려온 것인가? 그냥 같이 사고사로 위장시켜서 처리하면 편했을 텐데. 단항과 단풍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남자의 시선이 드디어 나에게 향한다. 그는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담지 않은 낯으로 잘도 입을 열었다.
“네가 아직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
“그 두 사람이 빌려간 돈이 조금이라도 너에게 들어갔다면 데려오지 않았을 거다. 의문은 해소되었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토하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데, 속을 게워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감각에 사로 잡힌다.
“몇 개월 뒤에 다닐 대학도 정했다. 졸업하기 전까지 교제는 하지 말고, 통금 시간은 잘 지키도록.”
서서히 모든 색이 흑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은 네 남동생이나 오빠에게 말해라.” 그렇게 말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을 빠져나간다. 단풍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단풍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을 벗어난다.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건 나와 단항이었다.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이 떨고 있었다. 아니, 몸 전신이 떨고 있었다. 단항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아침은 못 먹었다. 어떻게 먹을 수가 있을까. 2층으로 올라온 나를 붙잡은 건 단항이었다. “수프나 죽이라도 올리겠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원래는 먹는 걸 좋아한다. 어느 한 가게에 신상 메뉴가 나오면 도전 정신이 있을 정도로 탐구하는 걸 좋아하지만, 요즘 제 정신은 갉아먹히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셔도 됩니다.”
“그게 가능해?”
그러니 옆에서 들려오는 저 말은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치밀어오른다. 화를 내야 하는 상대가 이 애가 아니라는 건 매번 알고 있다.
“지키라는 것만 지키면 아버지는 그 외에 무엇을 하든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
그것이 피를 이은 자식이라고 해도. 어째서인지 뒷말이 그렇게 들리는 것 같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었다.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반 친구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랬다. 가족 사이에도 가식적으로 굴 수도 있다는 건, 최근에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집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으로 이어졌지만, 이 애는 뭘 말하고 싶어서 그걸 입밖으로 꺼낸 걸까.
“그러니까, 누님. 자신을 포기하지 마세요.”
이 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 조금 힘이 났다. 아까 그 남자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봄부터 다니게 될 대학교. 교제는 하지 말라고 했었지. 통금 시간을 지키라고 했다. 그 남자가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은 그 세 가지였다. “통금 시간이 언제야?” 라는 물음에 단항은 “8시입니다.” 라고 대답해준다. 되게 쩨쩨하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과 별개로 식사는 정말로 입맛이 없었다. “배고프면 알아서 먹을게.” 라는 말에 단항은 가볍게 “네.”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고마워.”
“…네.”
빈말이든 아니든 그 말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건 맞으니까, 고맙다는 제 말에 단항은 살짝 두 눈을 크게 뜨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준다. 역시 예쁘다. 그 생각을 끝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한숨 자고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0시였다. 점심 시간까지는 대략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누워서 휴대폰이나 하자. 생각해보니 제대로 휴대폰을 만지지 못했다. 기존에 설정했던 것을 떠올려서 앱을 정리하고 바탕화면을 설정했다. 애초에 사진도 없어서 바탕화면으로 할 게 없긴 하지만, 조금 더 밝은색으로 했다. 깨끗한 연락처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깔끔하지만 휑한 제 방을 둘러본다. 인형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쇼핑 앱을 들어가서 평소 좋아하는 폼폼 인형과 쓰레기 통 인형을 검색해봤다. 그 사이에 신상이 나왔구나. 이거 귀엽다. 하늘색 잠옷을 입고 있는 폼폼 인형은 안고 자면 좋을 것 같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수중에 가진 돈이 없다. 카드는… 이곳에 오기 전에도 없었다. 용돈은 정말 어쩌다가 한 번씩 줬다. 그래서 아꼈다. 어느 정도 모아놓으면 좋아하는 걸 하나씩 정도 샀다. 하고 싶은 걸 찾았는데 막상 할 수가 없다. 또 기분이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이러다가 조울증 올 것 같아. 그러면 적어도 정원을 둘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왔을 때 엄청 넓었던 것을 생각하면 바탕화면 해놓을 사진 정도는 찍을 수 있겠지.
다음 것을 정했으니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코트를 챙기고 문을 열고 나오니 바닥에 또 무언가 놓여져 있었다. 딸기 케이크랑… 카드? 포스트잇도 붙여져 있었다. ‘비밀번호는 0426입니다.’ 단정하고 반듯한 외모와 어울리는 정갈한 글씨체다. 단항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카드에 적힌 이름이 ‘DAN HENG’ 라고 적혀 있다. 새까만 카드는 그 애의 머리색을 닮았다. 괜찮은 건가? 자신에게 카드를 줘도? 잠만 단항은 나보다 두 살 어리다고 했지? 열여덟, 거기까지 생각하니 죄책감이 올라와서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다가가서 냅다 문을 열었다.
“카드 돌려줄게!”
“…누님, 노크부터 해주세요.”
갑작스러운 제 행동에 그 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입을 열어 말한다. 책상에 앉아있는 걸 보니 공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어, 미안.” 너무 급한 나머지 노크하는 걸 잊어버렸다. “다음부터는 잊지 마세요.” 제 사과에 그렇게 말한 그 애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에게 다가온다. 제 방과 마찬가지로 삭막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일단 카드 돌려줘야 한다.
“자, 이거.”
“누님은 돈이 없으시잖아요.”
이 녀석 아픈 곳을 찌른다.
“그런데, 누님.”
“응?”
“혹시 나가시려고요?”
“정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마스터 키도 없이요?”
“…….”
생각해보니 들어오는 입구 보안이 장난 아니었지. 일주일 사이에 그걸 잊어버리다니. 말없는 자신을 보고 단항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차라리 한숨을 내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단항은 몸을 돌려서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다시 자신에게 다가온다.
“마스터 키입니다.”
“나한테 주면 너는?”
“이건 여분으로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정원에 나가는 건 다음으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눈이 내렸으니까요.”
“어, 그러면 눈 쌓였겠구나.”
단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봐야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 밟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새하얀 풍경은 싫어하지 않는다. 제 말에 단항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걸 무시하고 마스터 키를 챙기면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카드를 단항에게 내밀었다. 그런 제 행동에 단항이 살짝 미간을 좁힌다. 어, 이런 표정도 짓는 구나.
“그냥 쓰세요.”
“아니, 넌 내가 뭘 살 줄 알고 카드를 주는 거야?”
“뭐든 사셔도 됩니다.”
“…….”
그래, 너 부잣집 도련님이지. 그렇다고 해도 나보다 어린 남자애한테 돈으로 신세 지고 싶지 않은데.
“누님이 입고 계신 옷, 가지고 계신 옷, 전부 제 돈으로 산 겁니다.”
“미친.”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심한 감기로 사경을 헤맬 때, 의사를 부른 값도 단항이 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난 이미 이 애에게 돈으로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면 속옷,”
“그건 도우미 아주머니의 돈으로 사셨습니다.”
“어어…”
“물론 후에 돈은 제가 드렸고요.”
“…….”
완전 K.O패다. 단항은 고개를 까딱거린다. 잔말 말고 카드를 받으라는 거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내밀고 있던 손을 쭈뼛거리며 거두었다. “그리고 나가실 거면 목도리와 장갑도 챙기세요.” 이쯤되면 이건 잔소리 같다. 그 두 사람에게도 받지 않았던 잔소리. 생각해보면 잔소리라는 건, 그 밑바탕이 걱정이라는 감정이 깔려져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은 애초에 자신을 걱정해주지도 않았다는 거다. 그 생각에 도달하니 또 마음이 착잡해진다.
“누님.”
“단항은 상냥하구나.”
“…….”
자신이 대답하지 않자 부른다. 그리고 자신은 생각하는 걸 그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 애가 말을 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말을 처음 듣는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단항의 표정이 괴롭다는 것처럼 일그러진다. 그래서 당황한 건 이쪽이 되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그저 단항을 바라보고 있자, 단항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눈이 제법 쌓였습니다. 걸을 때 조심하세요.”
“…응.”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 외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도대체 왜 괴로운 표정을 지었을까? 단항의 말대로 목도리와 장갑까지 한 채로 정원에 나와서 생각에 잠긴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나? 그런데 상대방이 다정하다고 말해주면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해보니 자신도 가끔씩 그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모르는 반 애여도 도와달라고 하거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그러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다정한 성격이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래도 괜찮으니까. 음, 그런가. 단항도 그런 건가.
그러면 굳이 사과하지 않아도 되겠지. 왜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건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집중한다. 새하얗게 변한 풍경은 깨끗하다. 제 방과 비슷한 색이지만, 이건 삭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풍경부터 찍자. 휴대폰을 들어서 카메라 앱을 켜고 찰칵, 소리를 내며 찍었다. 사진을 찍는 실력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지만, 그렇게 못 봐줄 것도 아니었다. 급한 대로 이걸로 배경화면을 해둔 뒤에 걸음을 옮긴다.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정확하게는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할까. 그러고 보니 어릴 때는 이 소리가 눈의 요정이 밟히는 소리라고 했던가. 그래서 한동안 그걸 믿고 무서웠던 적이 있었지.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남는다. 그 흔적을 제법 좋아한다. 이것도 찍자. 집이 나오지 않게 앵글을 잡아서 발자국을 찍는다. 이게 아까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그러면 이건 잠금화면으로 해놓을까. 이렇게 해놓으니까 제법 휴대폰을 꾸민 것 같다. 그게 좋아서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 나 여기 와서 처음으로 웃는 거구나. 그래도 여전히 웃을 수가 있구나. 다행이다. 그 생각이 드니 이번에는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으니까 울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오랜만에 맛 본 바깥 공기가 차가워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면 되지 않을까. 소리만 내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그건 어릴 때부터 잘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새하얀 풍경을 바라본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건 전혀 몰랐다.
점심은 부엌에서 단항과 마주 앉아서 먹었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걸 보니, 그렇게 눈이 빨갛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안 보인다. 단풍이 안 보인다.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단항이 “형님은 알아서 챙겨 먹을 겁니다.” 라고 말한다. 묘하게 차가운 말투에 형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 최대한 단항 앞에서 단풍 이야기는 하지 말자. 어차피 할 이유도 없기야 하지만.
“아가씨는 뭘 좋아하세요?”
“네? 어, 먹는 건 딱히 가리지 않아요.”
도우미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랐으나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가리는 건 없었다. “그러면 먹고 싶은 건 있어요?” 이어진 질문에 생각이 잠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반찬 앞에서 말해도 되나 싶기도 하다. 결국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괜찮다면서 나중에라도 떠오르는 게 있다면 꼭 말해 달라고 했다.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딸기 케이크 맛있었어.”
그래도 걸어서 그런지 입맛이 조금 돌아서 뒤늦게 딸기 케이크를 먹었다. 점심을 먹기 전에 간식을 먹는 건 좋지 않지만, 애써 챙겨준 것을 안 먹기에도 그랬다. 제 말에 단항은 “냉장고에 좀 더 있습니다.”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이따가 하나 더 먹어야 겠다. 냉장고에서 뭐 꺼내 먹는 거 가지고 트집 잡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마저 식사한다.
“번호 알려줘.”
“…네.”
식사를 끝내고 나서 단항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단항은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면서 휴대폰을 받더니 자신의 번호를 입력해준다. 「단항」. 새 휴대폰에 첫 번호가 저장되었다. 그런데 그러고 단항은 휴대폰을 다시 자신에게 돌려준다.
“네 번호도 알려줘야지.”
“누님 전화번호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응?”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니 단항은 “제가 드렸으니까요.”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아, 맞다. 그랬지. 이 휴대폰을 개통해서 준 사람은 이 애니까, 이 애는 처음부터 본인 휴대폰에 내 번호를 저장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해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챙겼다.
“그것보다 누님.”
“응?”
“봄부터 다닐 대학교가 어딘지 아십니까?”
“아니.”
“그런데 왜…”
궁금해 하지 않는 표정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굳이 지금 알 필요가 있을까, 일주일 전에 알아도 될 텐데. 거기다가 그 남자가 억지로 다니게 만든 곳이니 싫은 것도 있었다. 절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런 자신에게 단항은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알고 계시는 게 좋습니다.”
“…응.”
“D대학교, 전공은 천문학입니다.”
“천문학?”
“네.”
대학교 이름은 둘째치고 전공이 천문학이라는 점에서 놀랐다. 자신이 별을 좋아한다는 건, 아무리 그 남자라도 모를 텐데. 제 이름 때문인가? 그렇다면 아예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주제로 다루는 수업을 듣는 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경영학과였으면,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참고로 형님과 같은 대학입니다.”
“어…, 그건 좀.”
“그리고 저도 2년 뒤에는 거길 다닐 거고요.”
“그건 좋다.”
“…….”
제 말에 단항이 두 눈을 크게 뜬다. 아무래도 이런 말은 별로인 모양이다. “싫으면 미안.” 이라고 말하니 “그런 거 아닙니다.” 라는 말이 돌아왔다. 바라보는 얼굴은 살짝 상기된 것 같았다. 혹시 부끄러워하는 건가? 얘도 애는 애구나. 놀리는 말을 내뱉기에는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지 않아서 참았다.
“그러니 형님의 번호도 저장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음…”
“형님은 누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를 싫어하시는 거죠.”
“관심이 없다는 건 알아.”
싫어하지 않다는 게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때로는 무관심이 좋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암만 사교성이 좋은 자신이라고 해서 첫 인상부터 무관심을 드러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정도는 아니다. 그런 제 표정을 읽은 단항이 걸음을 옮긴다. 방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옆방으로 향하더니 똑똑 노크를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문이 열리고 단풍의 모습이 드러난다. 단풍은 단항을 보더니 “뭐냐?” 라고 물었고, 단항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다. 단풍도 따라서 시선을 옮긴다. 갑자기 미남 둘에게 열렬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겨서 단풍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알려주세요.”
“…하?”
이 사람 대놓고 짜증내고 있다.
“가족이니까 적어도 번호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단항의 말에 단풍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이 제 휴대폰을 가지고 본인의 번호를 입력하더니 전화를 건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본인의 휴대폰에 불빛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더니 끊고 도로 제 휴대폰을 돌려준다. 이름을 「단풍」이라고 저장하는 걸 본 단항이 단풍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형님도 지금 저장하시죠.”
“단항, 너 제정신이냐?”
“네.”
“넌 도대체… 아니, 아니다. 기다려.”
이게 형제의 대화인가. 맞물리는 대화가 아닌 것 같은데. 단풍은 고운 얼굴을 찌푸리더니 책상 위에 있는 휴대폰을 가져와서 몇 번 화면을 터치한 뒤에 보여준다. 「동생2」 라고 저장된 이름 아래에는 제 번호가 있었다. 잠시만 「동생2」? 그러면 「동생1」은 설마….
“됐냐?”
“네.”
단항의 대답에 단풍이 방 문을 닫아버린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단항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됐습니다.”
“…그래.”
어째서인지 단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뒤로 정말이지 평화롭게 지냈다. 외출을 하고 싶으면 단항을 끌어들였다. 이 동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있고, 바람도 좀 쐬고 싶고, 단항과 같이 다니면 적어도 그 남자가 의심은 하지 않을 테니까. 가끔은 단풍도 함께 했다. 대놓고 싫은 티를 냈지만, 보여 주기 식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응했다. 뭐라더라? 그래도 나름 남매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야 그 인간이 신경 어쩌고 저쩌고 그랬는데, 단항이 내 앞에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해서 단풍이 입을 싹 닫았다.
방에, 정확하게는 침대에 함께 할 인형 몇 개를 샀다. 한 번은 내가 폼폼 인형을 안고 있는 걸 본 단항이 좀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필요하면 빌려주겠다고 했더니 “필요 없습니다.” 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그렇게 조금 편하게 지내게 될 즈음에 그 남자에게 요구했다. 첫 번째, 고등학교 졸업장을 줄 것. 두 번째, 대학에 다니려면 노트북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후자는 거절한 걸 넘어서 한 마디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자신에게 안겨줬다.
웃긴 건 노트북 뿐만이 아니라 데스크탑, 태블릿까지 받게 되었다. 뭐지? 신종 협박인가? 내 중얼거림에 단항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일단 받으라고 했다. 줬다가 뺐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에 떨떠름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받았다. 도대체 너네 아버지는 뭐야? 라고 물으니 단항은 “글쎄요.” 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단항이 그 남자에 대해서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편안하면서도 편안하지 않은 시간을 지내면서 드디어 등교 첫 날이 다가왔다. 당당하게 걸어서 대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기각 당했다. 단풍과 같은 차를 타고 등교하게 되었는데 진짜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 “대학교에서 누가 귀찮게 굴면 형님을 파세요.” 단항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잘도 그런 말을 했다. 단풍은 그 말을 자연스럽게 먹금했다. 형제가 사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학교 생활을 만족스러웠다. 솔직히 이제 좀 숨이 트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리에 천문학 내용이 들어오는 건 별개였다. 내용은 어렵지만, 재밌다. 그 남자와 약속한 대로 교제는 생각하지 않고 통금 시간을 지켰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게임을 하거나 게임을 했다. 그것도 정 재미가 없으면 단항을 찾아갔다. 단항은 내가 찾아갈 때마다 싫은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애는 항상 책을 가까이 했다. 그래서 한 번은 천문학 관련 책이 있냐고 물으니 흔쾌히 빌려줬다.
그 뒤로도 단항에게 몇 번 더 책을 빌렸다. 그런 김에 추천도 받아서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책을 좋아하십니까?” 내가 그런 쪽 이미지와 맞지 않다고 느끼는지 단항이 물었다. “책이 아니라 별을 좋아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별을 보고 싶은 거였다. 어릴 때부터 별을 좋아했다. 달도 좋아하고. 가끔 달 옆에 별이 같이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단항은 딱히 말이 없었다. “그렇군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단항이 자신을 천문대에 데려왔다. 그 날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답지 않게 텐션이 올라서 플라네타리움을 보고 오랜만에 웃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단항은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다. 뒤늦게 그걸 알아챈 내가 “왜그래?” 라고 물으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딱딱한 말이 돌아왔다. 고개를 갸웃했지만, 단항은 입을 꾹 다물었고 그래서 그냥 별이나 잔뜩 봤다. 사진도 찍고 그걸로 잠금화면과 바탕화면으로 바꿨다. 처음으로 단항하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어색하게 브이를 하는 그 모습이 웃겼다. 단항에게 그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니 “…감사합니다.” 라는 어색하면서 쑥쓰러운 인사를 받게 되었다.
아무튼 나름 잘 지냈다. 그러나 그 남자를 내 입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날은 아마 평생 없을 거다. 그 남자도 딱히 그 부분을 지적하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여름이 찾아왔다. 이 집에서 처음으로 보내는 여름. 단항과 거리감이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이 된 계절이었다.
여름을 좋아하냐는 물음을 받는 다면 “글쎄.” 라고 대답할 것이다. 솔직히 봄과 가을이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는 계절. 무엇보다 무섭게 천둥번개가 내려치지 않기에 그 두 계절을 좋아한다. 대학생이 된 후로 처음 맞이하는 여름방학이다. 흔히 종강이라고 말하는데, 딱히 할 게 없다. 장마라고 비만 주륵주륵 내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까 단항은 비 내리는 것이 좋다고 했다. 비가 내리는 그 소리와 물 비린내가 안정감을 준다고 했던가. 그래서 순간 “물타입이구나.” 라는 말을 내뱉었다. 물론 단항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그리고 형제가 맞다는 것처럼 단풍 또한 그렇다고 한다. 여전히 단풍과 서먹서먹한 사이다. 한 번은 “단풍 오라버니.” 라고 불렀다가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그때 단항도 옆에 있었는데, 단풍에게 “누님한테 그 사나운 눈 좀 치우시죠.” 라고 아주 신랄하게 말했다.
그런 단항에게 단풍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 호칭은 뭘로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거기서는 또 알아서 하란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 단풍을 오라버니라고 부른다. 그럴 때마다 단풍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그것보다…
“…빗소리 너무 거칠어.”
그래, 빗소리가 너무 사납다. 이러다가 천둥번개라도 치면—
우르릉, 쾅!
그 소리에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급하게 문을 열고 맞은편 방 문을 열었다. 단항의 놀란 얼굴이 보였지만, 지금 자신에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그대로 그냥 침대로 뛰어드는 것도 모자라서 이불까지 뒤집어 썼다. 성인이나 된 주제에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냐고 하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무섭다. 흔히 천둥번개를 무섭다고 하면 죄라도 지었냐는 말을 종종 들었다. 죄를 지은 건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무섭다.
“…누님.”
뒤늦게 단항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들어와서 미안하다던가, 천둥번개가 무섭다던가, 조금만 있다가 돌아가겠다던가, 아무튼 그 어떤 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냥 머릿속이 새하얗다.
쿠르릉, 쾅!
“히익!” 그리고 다시 천둥번개가 내려친다. 덕분에 제 비명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몸을 좀 더 웅크렸다. 그 상태로 잠깐 있으니 침대 한쪽이 잠깐 기울어진다. “누님.” 단항이 단정한 목소리로 부른다. 그 속에는 걱정이 느껴졌다. 아마 그래서 뒤집어 쓴 이불을 살짝 들어올릴 수가 있었다. 단항의 고운 손이 보인다. 바로 옆에 있다. 그것을 확인하니 조금 더 이불을 내려서 얼굴을 마주한다. 자신을 본 단항이 마치 안심하라는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어준다.
순간 창문 너머로 하얀 빛이 번-쩍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들려오는 굉음 같은 천둥번개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눈앞에 있는 단항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단항이 당황했다는 건 안다. 그러나 무서움에 잠식된 몸은 내가 풀고 싶다고 해도 풀 수가 없었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는 것이 제 두 눈에도 보였다.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생각되는 와중에 잔뜩 흐트러진 머리 위로 손길이 느껴진다.
“괜찮습니다. 누님.”
아, 단항의 손이다. 이 애는 자신보다 조금 키가 더 크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남자애인지 몰라도 자신보다 손도 조금 더 크다.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정리해준다.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런 걸로 울고 싶지 않다. 생각해보면 이 애의 다정함은 그랬다. 마치 나보고 울어버리라는 것처럼 아픈 부위를 쓰다듬는다.
“…여름, 싫어.”
겨우 말했다. 여름이 싫다. 더운 게 싫다. 습한 게 싫다. 꿉꿉하게 만드는 비가 싫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천둥번개가 싫다.
“누님이 싫다면 저도 싫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하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 또한 다정하다. 그래서 놓아줄 수가 없다. 이건 단항이 잘못했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을 감는다.
“…….”
단항은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두 팔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걸 알았다. 잔뜩 두려움에 사로 잡혔던 그 앳된 얼굴이 편안하게 변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단항은 제 손에 감기는 잿빛 머리카락을 좀 더 쓰다듬는다. 그러자 스텔레의 몸이 휙, 하고 반듯하게 천장을 보며 자는 자세로 바뀐다. 덕분에 단항의 손이 허공에 떠버린다.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을 보고 단항은 손을 내려서 스텔레의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춘다. 도둑 키스였다.
제 아버지라는 사람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식을 사랑해서 둘이나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형제끼리 재산을 가지고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그 이유 하나로, 그것도 반은 다른 피가 섞인 자신을 데려와서 이 집에서 지내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그런 못된 성격은 물려 받지 않았다. 욕심도 없었다. 재산이니 회사이니 그런 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형님은 달랐다. 아마도 형님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추측이다. 형님 또한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라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지만, 그런 형님에게 적어도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걸 알렸다.
“나중에 형님께서 큰 일을 하실 때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부러 돌려 말했지만, 형님은 금방 눈치챘다. 그 의미가 아버지의 등을 돌리는 행위라는 걸. 형님은 곧바로 믿지 않았다. 제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꽤 머리를 굴렸다. 며칠동안은 감시까지 붙인 걸 알았다. 그저 평소대로 생활하고 한 달이 지날 즈음에 형님은 “나도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마.” 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살면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보기 좋게 깨졌다.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생기지 않는다, 라는 말에 사랑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체로 제 외모를 보고 나중에는 자신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걸 알고 접근한다. 그건 제 또래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싫었다. 그게 싫어서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등장으로 제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되었다.
예쁜 사람, 첫 인상은 그랬다. 덜덜 떨고 있음에도 금안은 빛나고 있었다. 그게 새까만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별을 떠올리게 했다. 올려다 본 하늘에서는 그저 작고 희미하지만, 실상은 오래 살고 찬란하게 빛나는 별. 반짝이는 별.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다가갔다. 그래, 보기 좋게 첫 눈에 반한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누님'이라는 호칭은 무척이나 달가웠다. 이 감정을 숨기기에 좋았다. 드러낸다면 도망간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도망갈 곳은 없지만, 자신은 그녀와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허락해주지 않았다. 경계심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말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제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영영 놓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들끓는 열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끙끙 앓는 그 모습이 마치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살렸다.
“고마워.”
목소리를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그 전에 “나한테 왜그래?” 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이제부터 누님이시니까요.” 라는 어설픈 대답으로 넘겼고, 그 뒤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부분에서 기뻤다. 고맙다고 말하는 얼굴은 자신과 비슷하게 무뚝뚝한 표정이었으나 아마도 그게 평소의 그녀일 터다. 이걸로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어리석게 느꼈다.
아버지에 대한 제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그녀를 이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은 고맙지만, 그것과 해서 안 되는 말로 그녀를 괴롭히는 건 별개였다. 그녀의 표정에서 빛이 사라지는 걸 본 순간, 제 안에서 낯선 감정들이 솟구쳤다. 죽일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허물 뿐인 아버지라는 존재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긴 했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그녀가 자신에게 공포심과 두려움을 갖는 다면, 그건 싫으니까.
이 집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타인의 행복을 빌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낯선 감각에 소름이 돋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면 소용없다. 언제라도 좋으니, 설령 희미해도 좋으니까 이 집안에서 그녀가 웃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당신 스스로를 포기하려는 건, 조금 화가 났다. 그래서 포기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또한 처음이었다. 그건 당연한 것임에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제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그녀는 스스로 움직였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고 제한된 곳이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한다는 건 자신에게 기뻤다. 가능하다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싶지만, 그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아직 필요하다. 창문 너머로 아래 정원에서 새하얀 눈이 가득한 그 속에서 홀로 걷고 있는 그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씁쓸하다고 하다면 이상한 걸까.
‘단항은 상냥하구나.’ 정원으로 내려가기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정말로 내가 상냥한 사람이라면 당신을 어떻게든 이 집안에서 벗어나게 해줬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집에 있으면 그녀가 불행하다는 걸 알면서도 제 옆에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녀에게 상냥하다는 말을 들었을때 괴로웠다. 나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첫사랑의 맛은 이런 걸까. 문득 그녀는 이성을 사랑해본 적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하얀 눈에 새겨진 발자국을 보고 신기하듯이 그 자리에 웅크리는 당신은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지만, 돌아올 대답이 무섭다는 이유로 관뒀다. 지금은 이 거리로 만족하기로 한다. 자신이 지켜볼 수 있는 거리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고 싶다.
그 날을 기점으로 그녀는 제 물건을 하나씩 사들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인형을 안고 있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폼폼 인형 줄까?” 라고 물어보는 것이 귀여웠다. 정말로 본인에게 잘 어울리는 인형을 안고 있다고 입밖으로 꺼내는 것보다 “필요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저런 인형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집 주변에 뭐가 있는지 알려달라는 이유로, 앉아서 공부만 하면 안 좋다는 이유로, 산책하는데 혼자 하면 재미없다는 이유로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물론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로울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 좀 더 자신에게 마음을 연다면, 의지를 해준다면 좋았다. 천문대를 데리고 간 이유도 그래서였다. 천문학을 전공으로 하게 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이거 봐, 단항. 예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처음으로 제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저 위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별을 보고, 본인이 그 속에 주인공인 것처럼 가장 빛나게 웃었다. 그리고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겼다. 이미 첫 눈에 반했으면서 또 반하는 건 무슨 경우인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홀렸다, 라는 표현을 이럴때 쓰는 걸까. 위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웃고 있는 그 모습에 욕심이 자리 잡는다. 그녀가 좀 더 웃었으면 좋겠다. 저 웃음이 자신에게만 향했으면 좋겠다. 그 옆에 언제라도 자신이 있었으면,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의 환희를 느끼고 싶다. 아무래도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는 참으로 위험한 거라는 걸 느꼈다.
욕심에 이어서 독점욕이라니. 그런 건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우습게 되었다. 저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이 안다면 두려워할 것을 알았다. 한번 웃어줬다고 갑자기 다가가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도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직 그녀에게는, 당신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좀 더 받아줄 수 있는, 내가 다가가도 괜찮다는 확실한 신호가 있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당신은 제 발로 나에게 왔다. 내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 모습이 확실한 증거였다. 그렇다면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하리라.
그러니 자고 있는 당신에게 입맞춘 것에 대해서는 봐줬으면 한다.
남동생의 방에서 잠들었다는 건 참으로 부끄러웠다.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해도 일단 이쪽은 누나이며 연상이다. 두 눈을 떴을때 “잘 주무셨나요, 누님.” 라는 목소리에 창피해서 죽을 뻔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겨우 내뱉었다. 다정한 그 애는 괜찮다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서 “무섭다면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라는 엄청난 말까지 들어버렸다. 괜찮다고 하기에는 안타깝게도 장마가 지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요근래 밤마다 단항의 침대를 뺐는 나쁜 누나가 되어버렸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해주고 싶다고 했다. 공부 빼고. 공부는 암만 봐도 자신보다 단항이 더 잘하게 생겼다는 걸 얼굴을 보면 알았다. 그리고 정답이었다. 전교 1등이라니, 오히려 대학생인 자신이 단항에게 배워야 할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말하는 자신에게 단항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럼 저와 데이트하시죠, 누님.”
“…데이트?”
“네, 데이트.”
데이트라는 단어를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었다. 그런 단어를 이 애가 내뱉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데이트를 가족끼리도 하긴 하지만, 뭐랄까.
“그거 단항이 말하니까 안 어울려.”
그래, 어울리지 않다. 이미지 차이가 엄청난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단항이 고개를 갸웃한다. “싫으시면 싫다고 하셔도 됩니다.” 어째서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건지. 이 애는 묘한 구석에서 자신감이 없다. 그러니까 이참에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한다.
“싫어할 리가 없잖아.”
“…그렇습니까.”
“응. 나는 단항 좋아해.”
“…….”
제 말에 단항이 침묵한다. 고장났다? 라고 해야 하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 “세상에 남동생 안 좋아하는 누나 있어?” 뒷말을 덧붙이니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그린다. 그러더니 “그런 가족도 있겠죠.” 라고 하면서 손을 내민다. 이렇게 보니까 제법 손이 크다. 생각해보니 이 애와 손을 잡는 건 처음인데. 뭐, 데이트이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손을 잡으니 단항이 기쁜 표정으로 변한다.
음, 역시 예쁘다.
그 애가 자신을 데리고 온 곳은 아쿠아리움이다. 마지막에 온 적이 언제였더라. 어릴때, 그때는 적어도 평범한 가족으로 있었던 것 같았는데. 기껏 좋은 곳에 와서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커다란 수족관 안에서 작고 귀여운 외관을 가지고 있는 해파리가 둥실둥실 떠 다니고 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단항 또한 자신처럼 이 해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가족, 친구 또는 연인끼리 온 사람들이 보인다. 이 속에서 나와 단항은 가족에 속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우리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 닮은 구석이 없는 가족. 그걸 가족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님.”
이 애는 마치 가족이라는 것을 각인하듯이 자신을 부른다. 처음에는 저 단어가 어색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난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더니,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펭귄 쇼를 합니다.”
“응, 보러 가자.”
아쿠아리움에는 펭귄 쇼와 돌고래 쇼가 있다. 일단 펭귄 쇼를 보고 그 다음에 돌고래 쇼를 보자. 제 의견에 단항은 그저 그거면 충분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라고 하더니 그냥 모든 걸 내가 하고 싶은 걸 이 애는 따라서 할 뿐이다. 솔직히 재밌지는 않다. 그러나 편하다. 이 애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서 좋다. 그래서 이번에는 먼저 자신이 단항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서 제 손을 붙잡는다.
“누님.”
“응?”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참으로 올곧다.
“있다면 어떡하려고?”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참으로 다정하다. 순간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내뱉었으면 또 그때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을 것 같아서 그러면 데이트 분위기가 안 좋아지니 참는다. 진중한 그 얼굴에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쿡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니 그 고운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미안, 내 남동생이 귀여워서 그만.”
“…저는 진지합니다.”
“응, 알아. 그래서 고마워.”
웃으면서 지낼 수 있는 건 이 애 덕분이다. 잡은 손을 이끌어서 걸음을 옮기자 단항은 순순히 따라온다. 에메랄드로 빛나는 물이 보이는 투명한 터널을 지나는 걸음이 가볍다.
“다음에는 바다로 가자.”
“네.”
“그리고 산도 가보고.”
“네.”
제 말에 단항이 꼬박꼬박 대답한다. 언뜻 보면 기계적인 말투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 애가 진심을 담아서 대답한다는 걸 안다.
오, 펭귄 쇼다.
단항은 정말로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데려다줬다. 바다와 산을 그리고 해가 잘 보이고, 별이 잘 보이고, 달이 잘 보이는 곳을. 아, 꽃도 가득 피어난 곳도. 가끔 단풍도 끌어들였다. 의외로 싫다거나 튕기지 않고 함께 해줬다. 오히려 두 남자가 합을 맞춰서 스케줄도 짜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걸 보면 형제는 형제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열여덟 살인 애가 스무 살이 되고, 스무 살인 내가 스물 두 살이 되고, 스물 두 살인 그가 스물 넷이 되었다. 그러니까 2년이 지났다는 의미다. 오늘은 단항의 졸업식이고, 학생 대표로 단상 위에 올라가서 무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기특하면서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님.”
“졸업 축하해.”
모든 걸 마친 그 애가 제 쪽으로 다가온다. 꽃다발을 건네니 단항이 선명한 미소를 그리면서 받는다. 이 애는 제 앞에서는 이렇게 잘 웃는 남동생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단풍, 오라버니는 일이 있어서 못 왔어.”
“네. 아침에 축하한다고 해줬습니다.”
“츤데레 형이구나.”
아직까지도 자신은 단풍을 온전하게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단풍이나 단항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단항은 부르기 어려우면 이름만 불러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보다 두 살 많은데 그러고 싶진 않았다. 스물 넷이 된 그는 학업도 학업이지만, 그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서 한 마디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일명 후계자 수업. 딱히 단풍은 불쾌하거나 싫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 사람은 안 왔어.”
“기대도 안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남자다. 나에게는 새 아버지.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래도 2년이면 뭔가 친근해져야 하는데 도통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도 잘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이 있냐, 없냐. 딱 그거만 물었다. 대체로 제 대답은 후자여서 그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그렇다고 처음에 했던 약속을 어기거나 반항할 생각은 없다. 아무튼 그렇게 2년이 지났다. 제 말에 단항은 실소를 흘리며 말한다.
단항은 조금 더 커졌다. 남자애들은 역시 성장판이 다른가? 대학교 가서도 커지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들에게 들어보면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니까. 지금보다 더 커지면 내 목이 아파질 텐데.
“누님?”
“응?”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이상한 생각이라니? 단항이 여기서 더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 걸?”
“엉뚱한 생각을 하셨다는 건 알겠습니다.”
제 대답에 단항이 피식, 하고 작게 웃음을 흘린다. 놀리는 말투에 입술을 비죽 내밀자 단항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이렇게 말한다.
“누님이 그러길 원하시면 그러겠습니다.”
“솔직히 이 이상 더 클 것 같진 않습니다.” 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자신이 할 말이 없어진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다가도 이 애는 장난이라는 걸 잘 하지 않으니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답한 거겠지. 자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것보다 아까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다.
“졸업장 보여줘.”
“여깄습니다.”
졸업장이 거기서 거기라지만,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니까 보고 싶다. 단항은 제 요구를 흔쾌히 들어준다. 음, 비슷하군. 제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다. 단항에게 돌려주려다가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을 보고 그냥 자신이 갖고 있기로 한다. 단항은 딱히 졸업장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아, 맞다. 사진.
“단항, 사진 찍자.”
“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하니까. 지나가는 분께 부탁해서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둘이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고 있었다. 이와중에 단항은 입이 안 웃고 있다. 푸흡,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단항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있잖아, 단항.”
“네, 누님.”
“가끔씩 든 생각인데, 그 호칭 앞에 내 이름 넣어서 부를 생각 없어?”
“…….”
제 물음에 단항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여태까지 이 애가 제 이름을 부른 적은 없었다. 언제나 “누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꼬박꼬박 단항이라고 불러주는데, 알고 지낸 시간이 2년이 되었으면 평범하게 누님이 아니라 “스텔레 누님.” 혹은 “스텔레 누나.” 라고 불러도 되지 않나? 그러니까 좀 더 친근한 느낌을 담아서.
“죄송합니다.”
“으응?”
네가 왜 사과해?
“그렇게 부르면 누님께 무례를 저지를 것 같습니다.”
“…단풍, 오라버니도 그런 이유야?”
생각해보면 이 애는 단풍도 우직하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예의를 너무 차리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이 애의 엄청나게 올곧은 성격이라면 납득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항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희미한 미소를 그린다. 아무래도 “스텔레 누님.”은 물건너 간 모양이다. 딱히 자신이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다고 말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들려주겠지.
“…네?”
“휴학 신청하라고 했다.”
저녁 식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단항이 졸업한 날이다. 이런 날에 지금 이 남자가 뭐라는 거지? 휴학? 지금 잘 다니고 있는 대학을 갑자기 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은 건 단항과 단풍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보다 단항에게 졸업 축하한다는 말은 안 하는 거야?
“H그룹 회장 아들과 결혼할 준비를 해라.”
“…….”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심장은 쿵, 쿵, 쿵, 쿵. 소리를 내면서 자신이 흥분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제 표정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남자는 2년 전과 같이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널 데려온 이유가 그거다.”
“…….”
“일주일 뒤에 맞선이다. 그런 줄 알고 관리하도록.”
그렇게 말한 남자가 식사를 마쳤다는 것처럼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인다면. 하지만 그런 용기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토하고 싶어. 그 생각이 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급하게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그 남자를 죽일듯이 바라보는 단항의 표정을.
2년 만에 자신은 다시 은둔형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와서 문을 잠궜다. 모든 걸 게워낸 몸은 힘이 없었다. 목구멍이 아프고 칼칼했으나 그것보다 분노가 머리를 지배했다. 너무나도 화가 나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그랬다. 아프다는 감각은 분노에 묻혀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남자를 한 번이라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어차피 저쪽도 자신을 딸로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건 아니야.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혹시나 우는 소리가 세어나가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가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걸 넘어서 몸을 웅크리며 울었다.
그날 밤, 나를 배려해서인지 본인 또한 충격을 받은 것인지 단항은 내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 애에게 이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싶었다. 한참을 울다가 잠들었다. 솔직히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실신에 가까운 거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휴대폰을 집어서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다. 여러 알람이 와있었다. 메세지였으며, 전부 단항이 보낸 거였다.
[누님, 주무시는 것 같아서 위장약은 문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누님, 죽은 놓고 가겠습니다.]
[사실 억지로 문을 열고 싶지만, 그러면 누님께 미움 받겠죠.]
[누님, 죽이 식어서 다시 갖다 놓았습니다.]
[누님…,]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한 메세지다. 올라오는 울컥함을 어떻게든 억누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원하지 않는 맞선을, 결혼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인간의 손에 놀아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순간 똑똑. 하면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린다. 그게 누구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누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자신의 얼굴을 엉망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어 잠궜던 방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앞에 서 있었던 단항이 안도의 표정을 짓다가 제 얼굴을 보고 괴로운 것처럼 미간을 좁힌다. 이렇게 다정한 애에게 제 솔직한 심정을 말해도 좋은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은 꽤 지쳤다.
“나…, 맞선도 결혼도 싫어.”
“…알고 있습니다.”
제 중얼거림에 단항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직 좀 더 학교를 다니고 싶다. 성적은 좋지 않지만, 천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좀 더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싶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좀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야? 단항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꾹 참는다.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문다. 그런 자신에게 단항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저와 결혼하시겠습니까?”
“…….”
절로 입술에 힘이 빠진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단항을 바라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청회색 눈동자에는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그게 자신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았다. 이 애는 제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자신보다 깊고 큰 분노를 품고 있다.
“…농담입니다.”
“…단항.”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단항은 자신에게 자주 지어주는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말한다. 어째서인지 농담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부름에 단항은 문앞에 놓고 간 죽과 위장약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도우미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죽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꼭 드세요.”
“…….”
“그리고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어떻게든요. 그러니까 누님은 스스로를 해치지 마세요.”
“…….”
자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에게 대화라는 것이 통할까? 그렇게 묻고 싶지만, 초췌해지고 심신이 약해진 자신은 두 살이나 어린 남동생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단항에게 「누님, 맞선과 결혼은 없던 일로 되었습니다.」 라고 메세지가 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몇 분 동안 바라봤다. 뒤늦게 「어떻게?」 라고 메세지를 보냈으나 단항은 읽지 않았다. 그 남자에게 말이 통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십 분 정도가 지나도 ‘읽음’ 이라고 뜨지 않아서 방에서 뛰쳐나와서 맞은편에 있는 단방의 방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방 안에서 단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허락없이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단항이 없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으나 단항은 받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단풍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단풍 또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감이 온몸을 감싼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화가 치밀어오른다. 그저 기다리는 것,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단항의 방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는다. 그대로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픽, 하고 힘없이 누워버린다.
침대에서, 이불에서 그 애의 향기가 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 애에게서 좋은 향기가 맡아진다. 부드럽고 다정한 향. 어쩌면 그래서 단항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던 걸지도 모른다. ‘누님.’ 순간 머릿속에서 그 애의 목소리가 울린다. 자신을 향해서 지어주는 희미한 미소 또한 떠오른다. 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 걸까. 나 때문에 네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불을 세게 쥐면서 두 눈을 감는다.
“…누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도 느껴진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단항이 돌아왔다는 걸 깨닫고 상체를 일으킨다. 그러자 손이 멀어진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한쪽 눈을 비비며 “단항.” 이라고 그 애를 부른다. 그러다가 수려한 그 얼굴에 덕지덕지 붙여져 있는 반창고를 보고 피가 차갑게 식어버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굳어버린다. 그런 자신과 다르게 단항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은 오늘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누가 그랬어?”
“누님.”
“그 사람이 그랬어? …나 때문에?”
“누님 때문이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나 때문이 아니야? 다른 곳은 괜찮은 거야?”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왜 이 애가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좀처럼 회사에서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어진 단항의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옷차림에 눈이 들어왔다. 단정한 정장 차림. 영락없는 회사원 차림이다. 어째서?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애가 왜 회사라는 단어를 내뱉는 거지?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한 자신에게 단항은 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나중에는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단항.”
“아버지는 형님과 제가 회사를 두고 경쟁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게 조금 더 앞당겨진 겁니다.”
“단항.”
“그 과정에서 아버지한테 조금 혼난 것 뿐입니다.”
“단항.”
“누님은 다시 자유이십니다. 전처럼 학교를 다니시면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걸 하시면…”
“단항!”
“…….”
제 언성에 이 애는 그제야 입을 다문다. 그러니까 이 애는 지금 그 사람과 거래를 한 거였다. 이 애는 나를 위해서 본인을 희생한 거다. 자신이 한심해서 미쳐버리겠다. 너무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물기로 흐려진 탓에 단항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애가 조심스레 제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을 느껴진다.
“울지 마세요, 누님.”
“왜, 왜 그랬어…”
“저는 괜찮습니다.”
“왜, 왜…”
“누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단항은 확실하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너는 바보야, 정말로 바보야. 중얼거리는 제 말에 단항은 살풋 웃어준다. 그 웃음에 결국 자신은 그 애의 품에서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버린다. 큰 소리로 울어버린다. 곧 그 애가 단단하게 자신을 끌어안는다.
“저는 기쁩니다.”
“제가 누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 말에 너는 언제나 나를 도와줬어. 네가 있어서 웃을 수 있었어. 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으나 눈물이, 울음이 멈추지가 않았다.
단정하고 말끔한 정장이 자신으로 인해서 젖어간다. 흐트러진다. 구겨진다. 그러나 단항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등을 도닥이면서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준다.
“…나는, 너에게, 뭘, 해줘야, 할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겨우 울음을 억누르면서 말하자 다정한 거절이 돌아온다. “그리고 말하면 누님은 저를 싫어하게 될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이없는 말에 얼굴을 확 들었다. 제 얼굴 상태가 지금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저런 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을 정도로 자신은 염치없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너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
제 말에 단항은 두 눈을 크게 뜨다가 곧 희미한 미소를 그린다. 그리고 다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엄지로 닦아준다. “그러니까, 말해봐…” 그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다시 입을 연다. 잔뜩 울어서 갈라진 형편없는 제 목소리가 뒤늦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항은 그건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것처럼, 그저 제가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입을 열어 말한다.
“누님은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너…”
“제가 할 겁니다.”
“으응?”
알 수 없는 말에 절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자신이 귀엽다는 것처럼 단항이 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싫으시면 얼마든지 때리세요.”
“그게 무,”
슨 소리냐고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입술이 먹혔다. 완전히 밀착되었다. 바로 눈앞에 단항의 청회색 눈동자가 보인다. 심지어 그 눈동자 안에 담겨있는 자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까지 보였다.
단항이 자신에게 키스했다. 정말로.
지금 상황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애를 밀어내거나 내가 먼저 입을 떼거나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고도, 몸도 그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것은 단항이다. 그리고 평소처럼 자신에게 자주 보여주는 미소를 그리며 고백한다.
“좋아합니다, 누님.”
아, 나는 어째서 몰랐을까.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너의 눈빛에 가득 담겨진 애정을, 네가 나에게 지어주는 미소의 의미를, 이렇게 조금만 자세히 보면 알 수가 있었는데. 결혼하자고 했던 그 물음은 농담이 아니었다.
너와 나는 서류상 남매다. 나는 그것에 가려서 잊고 있었던 것을 너는 항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와 나는 피를 나누지 않았다는 걸.
너는 남자고, 나는 여자라는 걸.
“이제 제가 싫으신가요?”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너를 싫어할 수가 없다. 좀 더 가족으로 지냈던 시간이 길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나에게 누님이니까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 있어서 너는 하나뿐인 남동생이니까. 단항이니까. 너와 같은 감정은 아니더라도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너를 애정하니까.
“아마 네가 여기서 나에게 더 한 짓을 해도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아.”
“…어째서죠?”
“단항이니까.”
자신의 대답에 이 애는 기쁘면서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두 팔로 나를 끌어안는다. 그로 인해서 심장 부근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쿵, 쿵, 쿵, 쿵.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지금 이 애의 심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웃기게도 자신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님은 저한테 다정하고 하셨지만,”
“…….”
“다정한 건 누님이십니다.”
“단항은 다정해.”
제 말에 단항이 실소를 흘린다. “누님.” 이 애가 자신을 부른다. “응.” 나는 짧게 대답한다. “…누님.” 단항은 다시 한번 더 자신을 부른다. “응.” 방금과 똑같이 대답한다. 안고 있는 두 팔에 힘이 들어간다. 갑갑하다는 감각이 있었지만, 버틸 수가 있었다.
“…스텔레 누님.”
“응.”
전에 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부르면 무례를 저지를 것 같다고. 그러나 그건 틀렸다. 너는 나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다.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네가 좀 더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충고 하나 하자면, 단항 때문에 그 인간을 찾아가서 맞선을 보겠다거나 결혼하겠다는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마라. 그게 그 녀석에게 가장 상처주는 행위니까.”
“…그러면 저는 뭘해야 해요?”
—“기다리고 있어. 나와 그 녀석이 계획한 일이 끝날 때까지. 아, 이건 말해두지. 단항은 너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고 싶어 한다.”
“…….”
—“그리고 동생 놈은 네가 곁에서 웃어주는 걸 원한다. 뭣하면 손이라도 잡거나 포옹이라도 해주던가 해라.”
“단항이 나를 그런 식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뭐, 처음에는 해가 서쪽에 뜨거나 저 놈이 뭘 잘못 먹었나 생각은 했다만.”
“…….”
—“네가 있어야 그 무뚝뚝한 동생 놈이 웃을 수가 있다. 나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
“알겠어요.”
그걸로 전화는 끝났다. 계획이 뭘까. 뒤늦게 궁금증이 올라왔지만, 다시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지 않았다. 단항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다.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단항은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방에서 책을 펼쳐도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멍 때리면서 페이지를 넘길 생각이 없다. 자꾸만 어제 단항과 나눴던 대화만 떠오를 뿐이다.
‘…결혼하고 싶다는 건 진심이야?’
‘누님을 다른 놈에게 주고 싶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나이가 10살 이상 차이 나는 정신 나간 놈에게는 더더욱요.’
‘…….’
‘저와 결혼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그렇게 물었던 것은, 화가 나서 그랬던 것이니 무시하셔도 됩니다.’
‘…응.’
‘그리고 누님.’
‘응?’
‘조금은 위기감을 가지고 계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는 누님에게 미쳐 있습니다.’
‘…….’
‘다음에는 입맞춤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펼쳐놓은 책 위로 엎어진다. 그 말을 듣고 놀라거나 무섭거나 싫다거나 아무튼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제 자신이 있다. 끝에서 그 애는 “누님,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세요.” 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어쩌면 두려워하는 건 단항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대로 계속 누나와 남동생으로 지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정말로?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아버린다. 그 애는 어떻게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한다고 확신을 가졌을까? 내가 그 애를 좋아하는 감정은 어떤 종류인지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다시 정상적으로 숨을 내쉬고 두 눈을 감아버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좋은 향기라던가, 머리를 넘겨주는 다정한 손길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제 의식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단항?” 이 집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해주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라서 두 눈을 뜨며 부르자, 그 애는 기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네, 누님.” 이라고 대답해준다. 정장 차림인 걸 보니 퇴근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깨웠군요.”
“아니야…”
올곧은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하고 억지로 상체를 일으킨다. 마지막 기억이 책상이었던 걸 떠올린다. 옮겨준 건 단항이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잠을 깨기 위해서 눈을 비빈다. 침대에 걸터 앉은 단항은 그런 나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뭔가 부끄러운데. 덕분에 잠이 확 깬다.
“얼굴 많이 좋아졌네.”
“아, 상처는 빨리 아무는 체질입니다.”
단항의 얼굴을 차지하고 있는 밴드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뻗어서 밴드 위를 가볍게 터치한다. 여기는 면적이 큰 것을 보면, 아무래도 가장 늦게 낫겠지. 조금, 아니 조금보다 더 속상하다.
“…누님.”
“응?”
부름에 응하면서 바라보니 단항의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였다. 처음 보는 반응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상태도 굳어버리고 만다. 깨끗한 청회색 눈동자에는 열기와 욕망이 느껴진다. 그것을 보니 이 애에게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안을래?”
“누님.”
제 물음에 이번에는 단항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이며 부른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답지 않게 그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이내 멀어지려는 그 애를 붙잡는다.
“안기면 알 것 같아.”
“…무엇을요?”
“내가 단항을 좋아하는 마음?”
“그런 걸로 누님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가볍게 여기는 거 아니야.”
절대로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저를 동정하시나요?” 이어지는 물음에 “그것도 아니야.” 라고 바로 대답한다. 너를 안타깝다고, 불쌍하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 애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은 그런 말을 내뱉을 생각조차 안 했을 거다.
“내가 너한테 나를 주고 싶은 거야.”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 안 해.”
“…….”
미친 짓이라는 건 안다. 처음부터 우리 둘은 남매가 아니지만, 서류 상으로는 남매로 가족으로 묶여있다. 그리고 어제 키스한 순간부터 우리는 불건전하고 부도덕적인 관계가 되었다. 거기다가 한쪽은 전부터 이미 품지 말아야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이 관계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나 다름없다. 비겁하게 변명하자면 이건 잘못 채워진 단추를 다시 채우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항.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후회할 짓은 하지 마.”
“…….”
단항이 시선을 내리 깔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쉰다. 얘가 내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건 처음인데. 거기에 더 해서 이 애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내일 아침에 제가 없습니다.”
“응. 그게 왜?”
“…제가 누님을 보살펴드리지 못하니까요.”
제 물음에 단항은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앓는 표정으로 변하며 말한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터진다. 그런 자신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단항의 얼굴이 웃음을 더 해서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만다.
“넌, 너는, 푸흡, 우직스럽게, 큽, 성실해.”
“…….”
단항은 아무런 말이 없다가 실소를 흘린다. “그렇게 말하는 건 누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너무 웃어서 맺혀진 눈물을 엄지로 닦아준다. 그리고 어제처럼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두 팔로 단항의 목을 끌어안고 두 눈을 감는다. 자신은 다시 침대에 눕게 되었다.
영정 사진에 그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단항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렇구나.” 자신은 무미건조한 말투가 그렇게 대답한 걸로 기억한다. 그것이 단항과 단풍이 계획한 일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단항은 내가 싫으면 장례식장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그 사람의 딸이기에 상복을 입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은 자리를 지키는 게 전부였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기쁘다는 감정도 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건 단항과 단풍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장례식장에서 그런 우리를 보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단풍이 혹은 단항이 시선을 주면 그들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단항은 나를 챙겼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앉아있는 단항의 어깨에 기대기도 했다. 그러면 단항은 제 손을 잡아줬다. 뒤늦게 표정 관리하는 게 힘들었다는 단항의 말에 아프지 않게 볼을 꼬집었다.
장례식을 끝낸 뒤에 전문 변호사가 집에 찾아왔다. 아무래도 재산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라서 조용히 방 안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런 자신을 단항이 이끌고 나오게 만들었다. “누님도 이 집 사람입니다.” 라는 말에 설득당했다. 그러면 뭐라도 조금 떨어지는 것이 있으려나, 하는 생각으로 듣게 되었는데 어마무시한 것을 듣게 되어서 역으로 당황하게 되었다. 부잣집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제 앞으로 떨어진 재산이 만만치 않았다. 두 눈을 크게 뜬 나에게 단풍이 “부족하냐? 더 주랴?” 이래서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단항이 “제 걸 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서 진땀을 뺐다.
제 휴학에 대한 건 취소가 되었다고 한다. 회사를 이어받는 건 단풍이고, 단항은 전부터 약속한 것이 있어서 단풍을 도와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건 “단항이 내 후배로 들어오는 거 기대하고 있었는데.” 라는 제 말에 2년 뒤로 늦춰졌다. 그렇게 재산에 대한 것도 얼추 정리가 끝난 뒤였다.
“이제 자유이십니다, 누님.”
“아, 그렇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는 자신에게 그 애가 뒤따라 오면서 말한다. 단항의 말에 자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사람에게서, 이 집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자유. 원래 두 사람의 계획에는 나에 대한 것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자신은 변수라는 셈이었다. 처음에 단풍은 그 사람이 심어놓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뭘 하든지 신경 안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단항이 두껑이 제대로 열리게 된 건, 그 사람이 H그룹 회장 아들과 결혼할 준비를 하라고 했던 그때라고 한다. 거기까지 들으니 그 다음부터는 대충 예상이 되었다.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이어서 단항은 나에게 물었다. 단항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가 있었다.
“누나랑 남동생 관계 그만 두자.”
“네.”
제 말에 단항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끝에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건 어디다가 둘까요?”
“아, 그거 내 방 물건이라서 방에 두면 내가 정리할게.”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단항은 들고 있는 박스를 제 방에 두고 나온다. 2년 동안 그 집에서 지냈지만, 생각보다 짐이 많은 건 아니었다. 오늘부터 지내게 된 새로운 이 집에서 필요한 물건은 단항과 단풍이 나 몰래 구비해둬서 엄청 놀랐다. 어쩐지 내가 지낼 곳은 미리 알아봤다고 할 때부터 의아하긴 했다. 사실은 두 사람 엄청 사이 좋은 형제가 아니냐고 물었을때, “글쎄요.” 라고 대답하며 단항은 작게 웃었다. 단풍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 단풍에게 가끔 안부 전화나 문자를 해도 되냐고 물으니 대뜸 “이 놈한테 허락 받아라.”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의아한 표정으로 단항을 바라보니 “괜찮습니다.” 라는 말이 돌아왔다. 거기서 알았다. 아, 질투구나.
아무튼 이삿짐 센터도 단항이 알아봤다. 그리고 이사 당일인 오늘 단풍에게 허락 받고 며칠 휴가를 냈다고 한다.
“짐 옮기는 건 얼추 끝난 거 같으니까, 나가서 사 먹을까?”
요리를 하기에는 아직 박스에서 꺼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마침 시간도 얼추 점심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네.” 제 물음에 단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러면 내가 살게.” 라고 하면서 휴대폰으로 미리 알아봤던 곳을 검색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또 이 애가 멋대로 굴 것을 알았다.
“스텔레.”
“응?”
그 이후로 단항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다. 처음에는 누님이라는 호칭을 벗어나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근하게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휴대폰을 바라보던 제 두 눈이 그 애에게 향하는 건 자연스럽다. 단항은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것에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무섭게 그 애가 작은 케이스를 꺼낸다. 달칵, 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반지다.
제 눈동자와 비슷한 색을 품고 있는 반지. 단항에게 악세사리 선물을 받은 건 이번 처음이 아니다. 첫 번째는 팔찌였고, 두 번째는 목걸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별로 장식된 그 두 개는 지금도 하고 있다. 그 두 가지는 친애의 의미로 받을 후 있지만, 반지는 그 의미가 확실히 다르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그 애가 작게 웃어주더니, 반지를 꺼내서 제 왼손 약지에 끼우며 이렇게 말한다.
“결혼을 전제로 저와 사귀어주겠습니까?”
“…대답도 하기 전에 반지 끼우고는?”
“죄송합니다. 여유가 없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거 치고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타이밍이 참….
“단항한테 선수 뺏겼네.”
“…네?”
제 말에 단항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고 두 눈을 크게 뜬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것과 닮은 미소를 그려본다.
“저녁에 반지 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저 뒤에 있는 가방에서 단항이 꺼낸 것과 비슷한 반지 케이스를 꺼내서 보여준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가운데에 박혀 있는 보석의 색이었다. 평소 이 애는 초록색을 가까이 둔다. 옷이나 물건을 말이다. 그건 차분하고 다정한 이 이에게 어울리는 색이다. 덕분에 이미지 컬러라는 느낌이 강하게 적용되었다.
아직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단항의 손을 잡고 이끄니, 얼떨떨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귀엽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반지를 똑같이 왼손 약지에 끼운다. 딱 맞았다. 몰래 단풍에게 물어보길 잘했다. 그걸 이야기하려고 고개를 들어서 단항의 얼굴을 보는데, 세상에 얼굴이 엄청 붉다. 심지어 목과 귀도 붉다. 그리고 눈가가 촉촉한 것이…
“우는 거 아니지?”
“…아닙, 니다.”
“울어도 좋지만.”
“…….”
운다면 내가 위로해주면 되니까. 그 말을 내뱉기도 전에 엄청난 힘에 이끌렸다. 단항이 제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효과음이 있다면 꾸아압—, 라고 표현 될 정도로 격한 포옹이다. 참고 싶지만, 아프다. “조금만 힘 풀어줘.” 그러자 금방 힘을 뺀다. 그 틈에 두 팔을 빼내고 단항을 마주 안아준다.
“아, 단항 때문에 내 계획 망쳤어~”
“…….”
“입욕제로 꼬시려고 했는데~”
“…….”
“그래서 뜨거운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
“그리고 자는 사이에 반지 끼우려고 했는데~”
“자꾸 유혹하지 마세요.”
“아직 침실 정리 덜 되었습니다.” 라는 이어진 말에 푸핫, 하고 웃음이 터진다. 손을 올려서 머리를 쓰다듬으니 목 부근에 부비적거린다. 부드럽고 간지럽고 좋다.
“있잖아.”
“…네.”
“밤에 누님이라고 불러줘.”
“그런, 취향이신가요.”
“단항 때문이다 뭐.”
약간의 항의에 단항이 하하, 하면서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귀여워서 귓가에 쪽, 하고 입을 맞춘다. 나보다 큰 몸이 움찔거린다. “나 배고파.” 그 반응에 위험함을 느껴서 말을 돌리니, 이번에는 귓가에서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단항은 안고 있는 두 팔을 풀고 이렇게 말한다. 딱 봐도 수려한 그 얼굴에는 참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누님을 굶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에 자신은 키득거리며 웃어버리고 만다.
누님.
그 애는 나를 그렇게 부른다.